조선 (朝鮮)단어장에 추가

요약
1392년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
설명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 한양(漢陽;서울)에 도읍하여 1910년까지 27대 519년 동안 지속되었다.

조선의 성립
고려는 북방민족 및 왜구(倭寇)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 귀족·사원 등이 노비·전호를 두어 경작케 하던 농장(農莊)이 고리대 등의 방식으로 더욱 확대되고 왜구가 해안선뿐 아니라 오지까지 습격하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 홍건적(紅巾賊)·여진족(女眞族)·왜구등을 물리치고 신진세력의 중심인물로 등장한 이성계는 1388년(공양왕 10)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최영(崔瑩)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어 신흥사대부와 손잡고 전제개혁을 단행,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고 국가재정과 신흥사대부의 경제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그는 1392년 7월 16일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려 개경(開京;開城)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국호를 계속 고려라 하고 서울을 개경으로 정하였으나 곧 새 국호의 제정과 천도에 들어가, 1393년 2월 15일부터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1394년 1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조선은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의 3대정책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사상 등 모든 면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의 성립은 우선 정치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중앙귀족이, 묘청(妙淸)의 난으로 지방귀족이 몰락케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정변(武臣政變)에 의하여 해체되고 고려 후기 무신정권 붕괴후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대두되었다. 한편 무신정권기에는 학자적 관료층인 신흥사대부가 등장하기 시작, 마침내 조선건국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들 사대부계급은 종래의 문벌귀족 및 권문세족에 비해 관료적인 성격이 강하여 왕조의 제도적 완비와 더불어 점차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의 성립은 사상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 후기에 들어온 주자학(朱子學)은 조선에 들어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었을 뿐 아니라 학문적·사상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여 국민의 일상생활 규범으로까지 파고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훈고학적인 유교와 불교신앙이 병존해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었다. 경제면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고려의 전시과체제(田柴科體制)로부터 새로운 과전법체제(科田法體制)로 발전하였다. 과전법 실시 결과 국가의 재정이 확충되고, 신진관료들의 경제기반이 마련되었다. 또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진전되었고, 이에 따라 양인자작농(良人自作農)이 많아져 전체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사회신분에서도 보다 발전하여 많은 천민들이 양인화하였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광범하게 존재하였던 향(鄕)·소(所)·부곡(部曲)은 조선에 들어와 없어졌다. 이는 천민집단의 특수행정구역이 일반 군·현으로 전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국민국가의 터전이 마련되었음이 주목된다. 15·16세기에는 주자학에 의한 유교적인 정치이념 위에 중앙집권적인 전제왕권이 확립되었고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 대내적으로는 한글창제와 단군시조 관념의 대두, 그리고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국경선의 확장에 따라 국토의식이 성장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여러 면에 걸친 커다란 발전은 고려의 중세사회가 조선의 근세사회로 이행되었음을 뜻한다.

조선의 발전과정


조선초기
태조∼예종(1392∼1469) 연간의 체제확립기이다. 태조는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개국공신(開國功臣)들과 함께 정치이념을 세우고 제도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증대된 개국공신과 왕실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원(芳遠;太宗)은 왕위에 오르자 왕권강화책을 펴고 여러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병권(兵權)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한편 호패법(號牌法) 실시, 계미자(癸未字) 주조, 신문고 설치 등을 통하여 조선왕조의 중앙집권화를 본궤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세종 때에는 훈민정음의 반포 및 측우기의 발명 등으로 민족문화의 굳건한 터전을 구축하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펼쳤으며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를 정비하였다.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의 설치에 의한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영토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의방유취(醫方類聚)》 《동국정운(東國正韻)》 《고려사(高麗史)》 등은 모두 이때 펴낸 책들이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즉 세조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을 처형하고 이징옥(李澄玉)의 난과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최항(崔恒)·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조선시대의 근본법전이며 통치의 기본이 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조선중기
성종∼경종(1470∼1724) 연간의, 사림정치가 행해져 지배체제에 변화가 온 시기이다. 고려 이후 조선 초기까지의 100여 년 동안 반포된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오던 《경국대전》이 1470년(성종 1)에 반포되어 여러 차례의 개정 끝에 1485년(성종 16) 완성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이 마련되었으며, 이른바 조종지법(祖宗之法)으로서의 법제적 근거가 성문화되었다. 성종은 유학을 장려하고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등을 편찬하였으며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는 등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을 완성하였다. 또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등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함으로써 그 뒤 진행되는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5세기후반 지방의 사림들이 대거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조선 초기에 성립된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양반관료정치의 구조적 모순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독서인군(諸書人群)인 영남의 유림이 주축이 된 사림세력이 중앙에 진출함으로써 훈구세력과 사림세력간의 정치적 대립이 전개되었고 이들 기성·신진세력간의 항쟁은 결국 사화(士禍)를 초래하였다. 최초의 사화는 특히 사초(史草)와 관계가 있어 사화(史禍) 라고도 하는 무오사화이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 대신들이 연산군을 충동하여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으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훈구파의 비행을 사초에 올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로써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고 김일손은 사형, 정여창(鄭汝昌) 등은 유배되었다. 1504년의 갑자사화 역시 연산군의 실정으로 훈구 및 사림파들이 커다란 화를 입은 사건으로서,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 궁중파 훈신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윤비폐출사건(尹妃廢黜事件)을 들추어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을 숙청하였고 한명회(韓明澮)·정여창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축출된 뒤 중종은 신진사림파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했으나, 유교적 이상정치를 표방한 급진개혁은 오히려 구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특히 중종반정 때의 공신이 아닌 자를 색출한다는 위훈삭제사전(僞勳削除事件)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모략으로 조광조 일파가 살해되었는데 이것이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이다. 4대사화의 마지막인 을사사화는 1545년(명종 1) 조정 권신들의 정권쟁탈전이 외척간의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계속적인 사화의 발발로 조선관료정치는 16세기 중엽에 파탄을 보게 되고 나아가 당쟁의 소지를 마련하였으나 사화 이후 오히려 유학의 심오한 발전과 학파의 성숙을 가져왔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거듭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서원 및 향약을 바탕으로 뿌리를 내린 사림은 16세기 후반에는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후 자체 내의 분열이 생기면서 붕당(朋黨)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즉 이조전랑(지금의 총무처 인사과장)을 둘러 싼 싸움이 그것이며 붕당의 시발에 해당된다. 1575년(선조 8) 김효원(金孝元)을 비롯한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의 동인(東人)과 심의겸(沈義謙)을 비롯한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의 서인(西人)에 의한 동서분당은 이이(李珥)의 조정으로 한때 잠잠한 듯하였으나 곧 싸움이 재개되었고, 정철의 처벌문제에 이르러서는 강·온 입장에 따라 동인이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이어 1608년(광해군 1)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사색당파가 성립되었고 몇 차례 분화를 거듭하다가 조선 후기 영조가 즉위하면서는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서인에서 분파한 노론의 일당독재로 변모되었다. 당쟁은 조선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모순에서 빚어진 것으로서 내부모순의 구조적 파악에 의한 분석이 요구되는데, 실학자 이익(李瀷)은 붕당론(朋黨論)에서 정치적·경제적 이해득실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한 반면, 최근 이태진(李泰鎭)은 <학연에 의한 붕당이 공존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여론정치(輿論政治)>로 보아 이채롭다.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 민심의 이반으로 사회가 정체되고 국가기강이 해이해져 국방이 허술해진 결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이라는 2차례 대전역(大戰役)의 대내적 원인을 제공한 바가 되었다. 양대 전란으로 조선 사회는 일대 변혁과 파국을 초래하였다. 7년에 걸친 미증유의 대란으로 조선을 전후기로 구분하는 분수령이 되기도 하는 왜란은 그 진행과정보다는 영향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즉 중국에서는 명·청 교체의 원인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덕천막부)]가 성립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까지 무인(武人)의 정치가 지속되었다. 한편 조선의 공예·인쇄·의학·주자학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근세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변화로서는 왕권이 약화되고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민생이 도탄에 빠져 수취체제를 전면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적과 양안(量案;토지대장)이 소실되고 납속제(納粟制;매관매직)의 남용으로 신분제도가 문란해졌으며, 전주본(全州本)을 제외한 실록과 불국사·경복궁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가 반출되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민중의 애국심과 자아반성이 고취되었고 명나라에 대한 유생들의 맹목적인 모화사상이 퍼지는 한편 실학사상이 발생하여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왜(倭)에 대한 적개심이 민족감정으로 깊이 뿌리박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여진족과의 항쟁이 발생하여 조선은 결정적 파국을 강요받았다. 당초 명과 후금(後金;淸)의 대세를 관망하며 양립외교로 유연하게 대처하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방비와 훈련에 힘쓴 광해군이 1623년 인조반정으로 퇴위한 뒤, 인조를 세운 서인정권은 무모한 친명배금정책을 표방하여 1627년(인조 5) 1차 후금의 내침을 받았다(丁卯胡亂). 형제관계를 맺은 뒤에도 조선이 여전히 반후금정책을 고수하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누르하치, 곧 청태종(淸太宗)은 스스로 10만대군을 이끌고 재침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명과의 단교, 청과의 군신관계, 왕자의 인질, 조공의 실시 등 굴욕을 강요하였다. 병자호란의 수모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자존심을 짓밟았고 이어 효종의 북벌계획으로 옮아갔다. 송시열·이완(李浣) 등 인재를 등용하고 화포제작(J. 벨트브레·H. 하멜)등 군비를 강화하였으나 효종이 일찍 죽음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 뒤 숙종 때 윤휴가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그쳤다.

조선후기
영조∼철종(1725∼1863) 연간의, 신분제도가 동요하고 실학사상이 대두되었으며 세도정치가 전개된 사회 변동기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절감하고, 인재본위의 관리등용을 목적으로 한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는 동시에 사색을 고르게 등용, 탕평정국을 이끌어나갔다. 또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양역(良役)의 불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軍役) 부담을 감소시켰다. 이에 따라 막연한 노동력을 단위로 했던 인두세(人頭稅)가 지세화(地稅化)하여 조세징수의 합리성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정조 역시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실시하는 한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새로운 활자개발 및 서적편찬에 힘을 기울여 《대전통편(大典通編)》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동문휘고(東文彙考)》 등을 편찬하였으며, 문화의 저변확대를 꾀하여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지원하여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17·18세기 이후에는 사회신분체제의 변동이 일어나, 노비에서 상민으로, 상민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이 많이 이루어져 결과적으로 노비호가 격감하고 양반호가 현저히 증가하였다. 왕실과 권력을 장악한 일부 양반에 의한 대토지점유의 경향은 대다수 양반층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특히 몰락양반인 잔반(殘班)은 양반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처지가 빈한하여 농민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규장각의 요직에 서얼출신이 임명되는가 하면 대다수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일부 농민이 부농·서민지주가 되는 한편 공명첩(空名帖)으로 관직을 사는 경우도 생기는 등 중인·상민계층이 분화하였다. 노비의 경우 양인이 종사해온 관청의 사령이나 하급서기의 일까지 맡게 되었는데, 군공(軍功)·납속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노비로서 양역에 2대 이상 종사하면 양인으로 승격시켜주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양반과 양인 사이 및 양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체제는 실질적으로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신분체제의 붕괴현상은 18세기 말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1801년(순조 1)에는 결국 공노비를 해방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사노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혁파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싹이 터 18세기를 전후하여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연구됨으로써 영조·정조 때 전성기를 이룬 실학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했던 유학의 한 학풍으로서, 종래의 주자학 일변도에서 양명학·고증학뿐 아니라 불교·노장사상(老莊思想) 및 서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함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정치에 적용된 예는 별로 없었다. 순조 이후에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60여 년간 이어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가운데, 많은 실학자들이 가톨릭 신봉문제 또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죄명 아래 탄압을 받았다. 이때는 일문일족이 중요관직을 독점하여 양반사회제도가 근본적으로 흔들렸고, 특히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으로 농민들이 빚에 몰린 끝에 고향을 떠나는 예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농민들은 적극적인 반항을 시도, 1811년(순조 11)에는 대규모 반봉건농민반란인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5개월 동안 평안도 일대를 휩쓸었다. 1862년(철종 13) 진주민란(晉州民亂)을 시발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산되었고, 조선은 근대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말기
고종∼순종(1864∼1910)연간의, 외세개입으로 인한 체제몰락기이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고종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섭정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행사,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실력본위의 인재등용, 서원 철폐, 제도와 풍속 개편 등을 추진하고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攘夷政策)을 펴서, 연이어 일어나는 민란 및 서구열강의 침략적 접근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당시에는 1860년 최제우(崔濟愚)가 반봉건·반침략을 주창하면서 창시한 동학(東學)이 교세를 확대해가고 있었고, 지식층 가운데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개화사상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양반의 봉건적 특권을 제한하고자 노력하였고,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단행하여 가톨릭을 탄압, 이를 구실로 1866년(고종 3) 조선을 침범한 프랑스함대를 격파(丙寅洋擾)하고, 이어 1871년 미국함대의 침공도 물리쳤으나(辛未洋擾),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유림세력의 반발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종 치하의 조선정부는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고 서구열강에 대해서도 점차 문호를 개방,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려는 하나의 방책이었다.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개국에 따른 모순과 갈등으로 개화·수구 양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나타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 등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특히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농민이 주체가 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으로서 반봉건·반외세의 자유평등주의·민족주의적 성격을 기본으로 한 민중의 무력투쟁이면서도 왕권을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보수적·전근대적 민중혁명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혁명의 배경으로서 농촌경제 파탄 등으로 인한 농민의 자각과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점차 정치집단화해 간 동학세력의 성립을 들 수 있다. 1894년 고부민란(古阜民亂)으로 촉발된 1차 봉기는 반봉건항쟁으로서 전봉준(全琫準) 주도 아래의 동학군이 황토현(黃土峴)싸움에서 대승한 것을 계기로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어 일본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이에 놀란 정부와 동학군은 서둘러 휴전을 성립하였다. 휴전성립 후 전봉준은 폐정개혁12개안에 대한 정부수락을 받아내고 서정개혁을 위한 자체기구로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2차봉기는 항일구국운동이었다. 정부가 청·일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으로부터 청세력을 축출하고자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요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부(제1차김홍집내각)를 수립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야기시켰다. 이에 전봉준은 최시형(崔時亨)의 온건파를 누르고 북접(北接)의 손병희(孫秉熙) 등과 합세하여 같은 해 10월 재차 봉기하였으나 공주 우금치(牛金峙)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참패,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민족사상 최대의 농민운동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의 결과, 대내적으로는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오개혁을 초래하여 봉건사회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극동정세의 변화를 가져온 청·일전쟁을 유발시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 구축의 빌미를 주었다. 그 뒤 일본은 3국간섭에 의해 새로이 진출한 러시아와 을미사변(乙未事變)·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의 사건을 통해 각축하였다. 1897년에는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간이나 거류하던 고종이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돌아와서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국호를 대한(大韓),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제국으로, 이후 급속히 붕괴해갔다. 1904년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성립시켜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키고 황실보호라는 미명 아래 내정에 간여하였으며, 같은 해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였다. 외국과의 조약·협정의 사전협의조항으로 외교권에 제한을 가하였으며, 특히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민족자본을 고갈시키고 한국의 금융을 지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제2차한·일협약)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월권을 확보하고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받아 보호정치를 단행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외무성이 외교총리가 되어 각국의 공사(公使)가 철수하고, 통감이 외교·내정을 관장하는 등 외교권과 주권이 상실되었다. 이후 한·일신협약(1907년, 정미7조약이라고도 함)으로 내정의 전권을 장악한 일본은 부수각서를 체결, 겨우 8800명에 불과한 군대를 재정부족을 구실로 해산시켰다. 1910년 8월 22일 조인되고 29일 공포된 합병조약에서 순종은 양국(讓國)의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 내용은 <행복의 증진과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한국황제는 한국의 일지(一地)의 통치권을 완전 영구히 일본황제에게 양여하고, 일본황제는 양여를 수락하고 전한국을 일본에 병합할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보다 못해 분기한 조선 말기의 의병은 크게 을미·을사·정미의병으로 나뉜다. 박은식(朴殷植)이 그의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에서 <애국적 전통의 민군(民軍)으로 민족의 정화(精華)>라고 정의한 바 있는 의병은 존왕양이의 척사사상으로 무장된 유학자들의 지휘 아래 동학군 가담 농민들이 주축이 되고 일부 상인·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성황후시해·단발령이 원인이 된 1895년 을미의병에서는 유인석(柳麟錫)·문석봉(文錫鳳)·이소응(李昭應) 등이 활동하였고, 을사조약에 반발한 1905년 을사의병에서는 최익현(崔益鉉)·민종식(閔宗植)·신돌석(申乭錫) 등의 항일구국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고종퇴위·군대해산이 원인이 된 1907년 정미의병에서는 허위(許蔿)·민긍호(閔肯鎬)·이강년 등의 전투부대화된 의병이 활동하였다. 특히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鱗榮)은 창의군(倡義軍)을 편성, 1만 명의 병력으로 서울진공(進攻)작전을 개시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병부대는 각기 근거지로 돌아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으나 1909년 일본의 야만적인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초토화되어 국내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점차 간도와 연해주등 해외기지로 옮겨 독립군으로 재편되었다. 의병항쟁과는 별도로 애국계몽운동도 각 분야에서 활발하였는데 정치·사회단체의 활동, 언론활동, 신교육운동, 종교운동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치·사회단체로는 보안회(保安會, 1905)·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1907)·신민회(新民會, 1907) 등이 있었다. 언론의 성격별로는 전통적·근대적 언론의 두 종류가 있었으며 한성순보·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및 기타 민족지가 다수 간행되었다. 신학문의 도입으로 공·사립의 각급학교가 설립되었으며 특히 민족주의 성격을 띤 사립학교가 번창하여 1910년에는 2000개교를 넘었으며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민족운동의 거점으로서 일본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항일구국의 열기를 확산해 나갔다. 종교운동으로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전파되었고, 손병희(孫秉熙)의 천도교·나철(羅喆)의 대종교 등 민족종교는 각기 동학·단군사상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다. 한편 1896∼1898년의 3년 동안 존속된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인 독립협회의 존재는 민권의 신장, 자유사상의 보급이란 면에서 수십년간의 역할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올려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의 표본이 되었다.

조선의 정치


양반관료체제
조선왕조의 지배질서는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 위에 수립되었다. 국왕 밑에는 양반이 관료로서 지배층을 형성하고 국가의 정치를 운영하였다. 양반은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차츰 관직을 가진 지배계층을 호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사족 또는 사대부로 통칭되기도 하였다. 양반은 그 사회적 기반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고려시대와는 비길 수 없을 정도의 숫적 증가를 가져왔다. 이것은 조선이 소수문벌의 귀족관료사회가 아니라 폭넓은 양반층의 관료사회를 지향하였음을 뜻한다. 음서제도(蔭敍制度)의 혜택이 줄어들고 과거제도가 거의 절대적인 관계진출의 등용문이 된 것은 이러한 사정에 의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특권을 독점하는 양반계충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결혼은 양반간에만 행해졌고 그들의 신분은 세습되었다. 양반계층 안에서도 문무·적서·지방의 차별이 있었다. 조선왕조 관료체제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관료들의 생활기반을 중앙에 집중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관료에게 지급되는 전지(田地)를 경기도에 제한함으로써 그들이 지방세력화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 한 것이었다. 관료체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영의정이 경연(經筵)·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관상감(觀象監)의 영사(領事)와 승문원도제조(承文院都提調)·세자사(世子師)의 직책을 겸임하는 것과 같은 광범한 겸임제의 시행이다. 이는 행정력의 분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 정치권력의 소수집중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리의 승진에 있어서 혈연·직업 등 신분 여하에 따라 승진품계에 일정한 제한을 하는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도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즉 양반의 양첩(良妾)·천첩(賤妾)의 자손에 대한 적서관이 엄격하였고 기술직이라는 직업관계에 대해서 차별대우를 하여 품계승진과정에서 참상관(參上官)·당상관(堂上官)이 되는 데 엄격한 제한을 하였다. 명목상 문·무양반체제였지만 실제로는 문관이 무관보다 훨씬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문치주의를 표방하는 유교정치의 본질적인 일면을 나타낸 것이며, 이 문관우위주의에 입각하여 문관의 겸임제가 널리 활용되었다. 지휘권을 갖는 고위 무관직은 대개 고급 문관이 겸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고위직은 고급문관으로 임명하였으며, 각도(道)의 병사(兵使)·수사(水使)는 관찰사가, 절제사(節制使)·첨사(僉使)는 수령이 겸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정치는 명분상 왕정, 형식상 문·무 양반에 의한 관료정치였으나, 실제로는 문신에 의한 지배체제였다.

중앙정치기구
정치기구는 고려 말기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태종 때 전면적으로 개편하였고 성종 때 《경국대전》의 완성과 더불어 중앙집권적체제를 완비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치기구는 크게 동반(東班)·서반(西班), 이는 다시 내직(內職;중앙)·외직(外職;지방)으로 구분되었다. 모든 관료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로 구분되고, 각 관아는 장(長)의 품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다. 중앙정부의 핵심기구는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였다. 의정부는 고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계통을 이은 최고 정책기관으로서,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3정승의 합의로 중요 국사를 의결하였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조는 처음에는 의정부의 종속기관과 같았으나, 왕권이 강화되면서 담당정무를 왕에게 직접 결재받아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반면에 의정부는 왕의 자문기관과 같이 되어 실무상의 권한이 약화되었다. 한편 왕명출납을 맡던 승정원(承政院)은 도승지(都承旨) 이하 6명의 승지가 육조를 분담하고, 국가의 모든 문서와 사건을 국왕에게 보고하며 왕의 명령을 각 기관에 전달하는 비서기관이었다. 한편 국왕의 학문기관인 경연에서는 정치문제가 많이 논의되었으며 이는 왕권의 독주를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왕권과 정부를 견제하는 기관으로 사헌부·사간원(司諫院)이 있었는데, 이 두 기관을 대간(臺諫) 또는 양사(兩司)라 합칭하였고 여기에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을 합하여 삼사(三司)라 하였다. 사간원은 왕권견제, 사헌부는 관료견제, 홍문관은 왕의 자문기관으로 각기 언론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였다. 사법기관으로는 왕의 직속기관인 의금부(義禁府)가 왕명에 따라 모반 등 왕조의 안위에 관계되는 중죄를 다루었다. 그 밖에 왕의 교서 등을 작성하는 예문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承文院), 시정(時政)을 기록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 경적(經籍)의 출판을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의 4관(四館)이 있었다. 서반 최고의 정책결정기관은 중추부와 오위도총부였으나, 중추부는 곧 유명무실해졌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오위도총부가 최고관부였다. 왕권·의정부·육조·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던 조선 초기의 정치체제는 임진왜란 후 비변사(備邊司)가 주요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크게 바뀌었다. 비변사는 1517년(중종 12) 왜구와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관청이었는데, 임진왜란 이래 문무고관의 합의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어 군사는 물론 정치·경제·외교·문화 전반에 간여, 초정부적인 기구가 되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각각 정치·군사의 최고기관으로 삼았다. 그 뒤 1881년(고종 31)의 관제개혁과 1894년의 갑오개혁 때 최고 행정부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및 궁내부(宮內府)·의정부 등 관제의 변화가 빈번했다.

지방행정조직
전국을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함경·평안의 8도로 나누어 각 도에 관찰사를 두고, 도 아래 300여 고을에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군·현을 두어 부윤(府尹)·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의 수령을 파견하였다. 각 고을의 차등은 취락·인구·전결(田結)의 크기 및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결정되었다. 군·현 밑에는 지방자치적 성격을 띤 면(面;坊·社)과, 그 밑에 이(里;村·洞)가 있었다. 이 이하에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조직이 행하여졌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도 밑의 지방조직은 4부·4대도호부·20목·43도호부·82군·175현으로 구획되었다. 한성부(漢城府)와 유수(留守)가 배치되던 개성부(開城府)는 국초부터 중앙관서에 속해 있었고 뒤에는 광주(廣州)·강화(江華)·수원(水原)도 경관직(京官職)으로서 중앙의 직할을 받아 지방관제에서 제외되었다. 수령감찰의 임무를 띤 관찰사는 종2품직으로 풍헌관(風憲官)이라는 의미에서 중앙의 대사헌과 다름이 없었다. 수령은 일반국민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이었으며, 그 주된 임무는 공부(貢賦)를 중앙으로 조달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지방행정에는 양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보조기관에 지나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 이들 지방관은 행정·사법 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나 그 임기는 관찰사가 1년(후기에는 2년), 수령이 1800일로 제한되어 있었고, 또 그 연고지에 임명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방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도와 규모가 큰 부, 목에는 관찰사와 부사·목사를 보좌하기 위하여 도에 도사(都事), 부·목에 판관(判官)을 파견하였으며, 그 밑에 행정실무자인 서리(胥吏)를 두고 6방(房)으로 나누어 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서리는 그 지방 출신의 세습제 향리로서 무보수로 근무하였다. 지방사정에 어두운 지방관은 자연히 지방행정을 서리에게 위임하게 되었고 이들은 지방관과 백성의 중간에서 부정행위를 자행, 뒤에 암행어사제가 성립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방백(方伯)·수령은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 및 군사권까지 쥐고 있었기 떼문에 군교(軍校)와 사령(使令)을 거느렸다. 이 밖에 수령의 자문기구로 향청(鄕廳)이 있었다. 향청은 재향 양반들의 집회소였던 고려말 유향소(留鄕所)의 후신으로서, 향소라고도 하며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임명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는 등 지방행정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자 현직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경재소(京在所)를 서울에 두었으나 중기 이후로 별다른 활동이 없어 선조 때 폐지되었다. 그 밖에 향리의 한 사람을 서울에 상주시켜 지방관청의 일을 연락·대행하도록 한 경주인(京主人;京邸吏)과, 각 감영에 파견되어 감영과 고을간의 연락을 취하던 영주인(營主人;營邸吏)을 두었는데 이들의 활동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잠시 향약이 유향소를 통하여 보급·실시되었다. 유교의 도덕규범을 지방자치규율에 적용한 이 향약은 고을단위로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보다 소규모의 동약(洞約)·동계(洞契)로 시행하기도 하였으나 이상에 치우친 관주도적(官主導的)인 성격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군사제도
군사제도도 중앙과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태조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어 군사기구의 정비를 꾀하였으나 종친·공신들이 사병을 소유하고 있어서 국가에 의한 병권의 집중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400년(정종 2) 사병을 혁파하여 삼군부에 귀속시킴으로써 병권집중을 단행한 사람은 이방원, 즉 태종이었다. 삼군부는 1466년(세조 12)에 오위도총부로 개칭되고 도총관(都摠管)을 수반으로 하여 중앙군인 5위를 지휘하게 되었다. 5위는 의흥위(義興衛)·용양위·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를 말하며, 편제별로 입직(入直)과 시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각기 지방의 병력을 분담, 관할하였다. 각 위는 다시 5부(部)로 나누어졌고, 병종별 분속과는 별도로 서울 및 전국의 각 진관군사(鎭管軍事)가 각 위에 분속하도록 규정되었다. 오위제도는 임진왜란 때 무력함을 드러내 후기에는 오군영제(五軍營制)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중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 등 삼수병(三手兵)이라는 특수부대를 훈련, 양성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신설되었다. 그 뒤 숙종 때까지의 군제개혁으로 총융청(摠戌廳)·수어청(守禦廳)·어영청(禦營廳)·금위영(禁衛營)을 설치, 훈련도감과 함께 오군영을 이루어 주로 서울과 경기지방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지방의 군제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서, 각 도에 병마절도사(兵使)와 수군절도사(水使)가 있는 곳을 주진(主鎭)이라 하였다. 주진 아래에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어 그 크기에 따라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을 두었는데, 이들 군직은 수령들이 대부분 겸직하였다. 각 도에는 병영과 수영을 설치하고 그 아래 여러 진영을 두었는데 병영의 장관을 병마절도사, 수영의 장관을 수군절도사라 하고, 영(營)·진(鎭)에 소속된 군인을 진수군(鎭守軍)이라고 하였다. 진수군은 정병인 영진군과 노동부대인 수성군(守城軍), 해군인 선군(船軍)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중 영진군은 양인인 농민을 기간으로 한 군대로서 하번(下番) 때는 농업에 종사하는 병농일치의 군대였다. 각도의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하였고 수군절도사는 도에 따라 병마절도사가 겸하기도 하였다. 병종(兵種)은 대체로 3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는 왕실호위의 명분으로 편성된 특수부대, 즉 왕실의 먼 친척, 대신·공신의 자제 등 특수층으로 편성된 병종이다. 둘째는 갑사(甲士)와 같이 무과시험을 거친 직업군인으로서 이들이 오위의 중심병력을 이루었다. 셋째는 양인의 의무병역으로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 있어 전체병력의 80%를 차지하였다. 양인의 군역의무의 대상은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정남(丁男)으로, 이들은 현역군인이 되거나 현역군인의 비용을 충당하는 봉족(奉足) 또는 보인(保人)이 되었다. 이것은 세조 때 보법(保法)으로 제도화되었는데 2정(丁)을 1보(保)로 하여 군호(軍戶)의 기본단위로 삼았고, 갑사·정병·수군 등 병종에 따라 그 봉족의 수를 달리하였다. 지방에서 발생한 군사적인 긴급사태를 중앙에 알리는 방법으로는 횃불과 연기를 사용하는 봉수제(熢燧制)를 두었고, 문서로 알리는 방법으로 역마제(驛馬制)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군이 속오군체제(束伍軍體制)로 바뀌어 사노비까지 이에 편제되었고, 의무병역제도도 점차 무너져 모병제로 바뀌었다. 말기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후진적인 군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1907년 일본의 강요로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해산된 군인들은 그 뒤 항일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사법제도
행정과 사법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중앙에서는 형조·의금부·한성부·사헌부·장례원(掌隸院) 등이, 지방에서는 관찰사·수령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형조는 사법·행정의 감독관청인 동시에 복심재판기관(覆審裁判機關)이었으며, 의금부는 왕의 명령을 받아 특수범죄를 다루는 특별재판기관이었다. 한성부는 서울의 일반행정 및 경찰업무와 함께 전국적으로 토지·가옥·묘지 등의 소송을 담당하였다. 사헌부는 규찰·탄핵 등 감찰업무를, 장례원은 노비에 관한 문서·소송을 맡았다. 경찰사무는 중앙의 포도청(捕盜廳), 지방의 진영장(鎭營將)이 겸하는 토포사(討捕使)가 맡아보았고, 감옥사무는 전옥서(典獄署)가 담당하였으나 실제로는 각 관청이나 군문에서 소관직무에 대한 범법자를 잡아 가둘 수 있었다. 형법은 대개 《대명률(大明律)》에 의하여 그에 따라 형벌을 사(死)·유(流)·도(徒)·장(杖)·태(笞)의 5종류로 하였다. 사형에는 교(絞)·참(斬) 등이 있었고, 유형은 유배지의 거리로 형의 경중을 구별하였는데 정치범에 많이 적용하였다. 형벌은 일반적으로 가혹하였다. 사형의 경우,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여 형조가 재심한 뒤 다시 국왕에게 보고하여 의금부에서 3심(三審)하는 절차를 마련하였고, 재판에 불복이 있을 때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임금에게 직소(直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나 널리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민사(民事)는 성문규정(成文規定)이 별로 없어 주로 관습에 의존하였고, 분쟁의 해결도 행정관의 재량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제도에 관한 일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대부분 의존하였고, 상속에 관해서는 종법(宗法)과 조종(祖宗)의 제사가 중요시되어 그에 관한 법규가 발달하였다. 민사소송에 관한 것으로는 노비와 토지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다. <학제와 과거제도>학문과 교육은 주로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이루어져, 학교는 과거의 준비기관이나 다름없었으며, 교과내용은 유학과 한문학이 주가 되었다. 양반자제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한문의 기초를 익히고, 15∼l6세가 되면 중앙에서는 사학(四學)에, 지방에서는 향교(鄕校)에 진학하였다. 수년간 수학한 뒤 소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하여 문과(대과)에 대비하였다. 최고학부인 성균관에는 생원·진사 외에 사학의 생도, 공신·훈신의 자제로서 입학시험에 합격한 자, 현직하급관리 가운데 지망자 등이 입학하였다. 무과계통의 교육기관은 전혀 없는 상태였고, 잡과계의 교육은 각기 해당되는 관부에서 맡았다. 즉 역학(譯學)은 사역원(司譯院)에서, 의학은 전의감(典醫監)에서, 율학(律學)은 형조에서, 천문지리학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산학(算學)은 호조에서, 화학(畵學)은 도화서(圖畵署)에서, 도학(道學)은 소격서(昭格署)에서 관장하였다. 이러한 잡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직을 세습하는 동안 하나의 신분계층을 이루어 서리들과 더불어 중인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의 등용에 과거가 매우 중요시되었다. 과거는 문과(문관시험)·무과(무관시험)·잡과(기술관시험)의 3부문으로 나뉘어졌다. 문과는 다시 대과와 소과로 구분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문과라 하면 대과를 의미하였다. 소과는 다시 유교경전을 시험보는 생원과와 시·부·표·전·책문 등을 시험보는 진사과로 구분하였고, 이를 합하여 생진과 또는 사마시(司馬試)라 통칭하였다. 소과에서는 초시(初試)·복시(覆試)의 2단계를 거쳐 200명을 선발하였다. 대과에서는 소과에 합격한 생원·진사와 하급관리가 유교경전·사서(史書)·사장(詞章)을 겨루었다. 대과초시는 각도별로 시행하였고 대과복시는 서울에서 시행, 대과초시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33명은 국왕 앞에서 3차시험 즉 전시(殿試)를 치렀다. 전시에서는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등급을 결정하였다. 과거의 응시자격에는 신분제한이 있어서 문과에는 양반계층만 응시할 수 있었다. 무과는 대과·소과의 구별없이 초시·복시·전시를 실시하였고 시험과목으로는 궁술·창술·격투 등의 무예와 경서·병서가 부과되었다. 무과의 응시자격에 관한 신분 제약은 문과에 비하여 적은 편이어서 향리나 양민으로서 소양이 있는 사람이면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잡과는 사역원·관상감·전의감·형조·공조 등 해당관부에서 양성하는 기술수련자에게 역학·음양학·의학·율학·산학 등의 시험을 부과하여 수요인원을 선발하였다. 과거는 3년마다 정기적인 식년시(子·卯·午·酉)가 실시되었고, 임시·부정기적인 시험으로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과거 외에 학행과 덕망으로 천거되는 추천(推薦), 유공자의 자손이 특채되는 문음(門蔭) 등의 음서로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과거와는 별도로 하급관리의 용인법(用人法)으로서 취재(取才)가 있었다. 양반의 자손·친척이나 경아전(京衙前)인 녹사(錄事)·서리 등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실시하였는데, 과거와 달리 일정한 관계(官階)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조선의 경제


토지제도
조선의 토지제도는 1391년(공양왕 3)에 성립된 과전법(科田法)이 바탕이 되었다. 과전법은 현직과 산직(散職)을 가리지 않고 관직의 품계에 따라 18과(科)로 나누어 모든 관리에게 경기지방의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과전·공신전을 경기지역에만 국한한 것은 토호화(土豪化)를 막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공신전이 건국 초기부터 계속 확대되었고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이 세습화하였으며 새로 과전을 받을 관직자의 수가 날로 증가하여 경기도 내의 토지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태종 때는 과전의 일부를 삼남지방에 이급(移給)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폐단이 생겨 세종 때 다시 경기도 내로 환급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세습화된 과전을 폐하고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분급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은 직전법의 실시로 퇴직이나 사망 후의 보장이 없어지자 재임기간중 수조(收祖)를 통한 수탈을 자행, 1470년(성종 1)에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직전세의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국가가 전호(田戶)로부터 직접 조세를 거두어 전주(田主)에게 지급하는 것으로서, 이로 인하여 전주의 직전에 대한 토지지배가 불가능해졌다. 직전제는 명종 때 실질적으로 폐지되었고, 그 뒤 관료들은 녹봉(祿俸)만 받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들에 의한 대토지소유는 농장(農莊)의 형태로 존재하였고, 또한 확대되어갔다. 《경국대전》에 정해진 조선의 토지제도는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후, 궁방전(宮房田;왕족에게 지급)이 설치되고 관둔전(官屯田;지방 관아의 공유지로 편성)이 확장되었으며 은결(隱結)이 급격히 증가하는 등 실제로는 크게 변화하였다. 후기에는 이앙법(移秧法)이 도입되는 등 농업이 발달하면서 광작(鑛作)이나 상업적 농업이 전개되어 서민지주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조세제도
토지를 대상으로 한 전세(田稅), 신역(身役)으로서의 요역과 군역, 호(戶)를 대상으로 한 공물(貢物)이 국가 재정수입의 대부분을 이루었고 중기 이후에는 환곡이 재정수입의 일부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전세제도는 고려 말기 과전법의 조세규정을 그대로 따라 조(租)는 1결에 30두(斗), 세(稅)는 1결에 2두씩 징수하였다. 조세율은 풍·흉에 따라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하였다. 1444년(세종 26)에는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제로 개혁, 1결에 최고 20두, 최저 4두를 받되 조세량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랐다. 전분육등법은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을 사용하여 전국의 토지를 그 비옥의 정도에 따라 1등에서 6등전까지 나눈 것이고, 연분구등법은 매년의 수확을 그 풍흉에 따라 상상년(上上年)에서 하하년(下下年)까지 9등분하여 조세의 기준으로 정한 것이었다. 1634년(인조 12)에는 토지의 비척(肥瘠)만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일정한 세율을 적용하는 영정법(永定法;定率法)으로 전세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1결당 전세 4두는 명목상의 것일 뿐 삼수미·대동미·결작(結作) 등 여러 가지 부가세를 징수, 가혹한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토지를 이탈하는 농민이 늘어나게 되었다. 요역은 국가가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남자에게 노동력을 부과하는 것으로 중앙이나 지방의 토목공사 등에 동원되었다. 요역일수는 1년에 6일 이내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고, 관이 임의로 징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양역인 군역에 있어서는 입역자의 비용을 봉족 또는 보인이 부담하여 보포(保布)를 냈는데 차츰 입역의무자들도 군포로 입역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명종 때부터는 군포를 국가의 세입으로 수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군포의 징수과정에서 어린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나 죽은 자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 많은 폐단이 생겨났다. 이에 1750년(영조 26) 균역법을 실시, 농민의 부담을 다소 감소시켰다. 공물은 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여 백성이 공납하는 토산 현물로 주·현을 단위로 하여 일률적으로 징수하였다. 공물의 부담은 전세나 역보다 무거웠고 부과나 징수과정에서도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일단 배정되면 감면이 어려웠고 납입·저장·운반에 어려움이 많아, 이른바 방납(防納)의 폐단을 낳았고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하였다. 이에 17~18세기에 걸쳐 공물의 전세화(田稅化)라 할 수 있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으나 공물은 필요에 따라 여전히 수납되었고 농민에게 큰 혜택을 주지는 못하였다. 환곡은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대여해주기 위해 만든 제도였으나 지방관아와 중앙정부의 재원으로 변질되면서 농민을 수탈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한편 조세를 운반하기 위해 조운(漕運) 및 조창제도(漕倉制度)가 발달하였는데, 조운의 운영은 사선(私船)에 많이 의존하였다.

양란 이후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제도의 파탄과 국고의 고갈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치·군사 등의 개혁과 아울러 취해진 수취체제개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세제의 개혁: 양전(量田)의 실시, 전세의 동일화
② 대동법의 실시(결과): 농민의 과세부담 경감, 공납의 전세화, 조세의 금납화, 상품·화폐경제의 성장
③ 균역법의 실시: 농민의 군포부담 경감, 균역청의 설치 등이다.

이렇게 17~18세기에 걸쳐서 진행된 경제제도의 개편은 일시적인 효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으며, 궁극적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의 재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참고로 조선 후기 토지 1결당 농민 부담은 대동미 12두, 전세 4두, 삼수미 2.2두, 결작 2두로 총 20.2두였다.

상업과 수공업
상업은 서울의 시전(市廛)과 난전(亂廛), 중기 이후 지방에 개설된 장시(場市) 및 상설점포와 보부상, 그 밖에 도고(都賈)와 국제무역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시전은 태종 때 정부에서 종로(鐘路)에 행랑(行廊)이라는 상가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행랑세를 받고 빌려 주어 상점을 경영케 하던 관설상점(官設商店)이었다. 시전 가운데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생선을 궁중과 관부(官府)에 독점공급하던 6개의 어용상점은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여 가장 유명하였다. 난전은 관청의 허가 없이 장사하던 가게로, 정부는 육의전과 시전에 난전을 금하는 권한을 주어 이를 제지하였으나 뒤에 난전의 세력이 커지자 1719년(정조 15)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철폐하였다(辛亥通共). 15세기 후반 전라도지방에서 비롯된 장시는 점차 그 수가 증가하여 18세기에는 전국의 장시가 1000곳에 이르렀는데, 5일마다 정기적으로 서는 5일장이 일반적 형태였다. 보부상은 상품을 보에 싸거나 지게에 지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으며,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구성하고 비상시에는 정부의 전령 또는 치안의 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전도매(市廛都賣)와 사상도매(私商都賣) 2가지 형태의 매점상업, 즉 도매상업이 발달하였다. 도고 즉 도매상 가운데 특히 경강상인(京江商人)·개성상인(開城商人) 등의 매점사업이 활발하였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객주(客主)라는 도매상이 창고업·숙박업 등을 하며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매매를 거간하는 등의 형태로 자본을 형성해갔다. 국제무역은 중국·여진·일본과의 사이에 관무역 및 약간의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인삼과 은이 주로 거래되었고, 개성의 송상(松商)이 국제무역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다. 조선은 농업을 경제기반으로 한 사회로, 공업은 농촌에서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한 가내수공업이 주가 되었고, 그 밖에 전문적인 수공업자(工匠)가 관청에 소속되어 물품을 제조하는 관영수공업이 행하여졌다. 공장은 중앙의 공조 및 관아에 속한 경공장과, 지방의 도와 군현에 소속된 외공장으로 크게 구분되었다. 장인은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했으며 보수는 없었다. 17∼18세기에 이르러서는 재정부족으로 관영수공업이 쇠퇴하고 사장(私匠)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대동법 실시 이후 수공업자와 공인(貢人)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사영수공업계가 활기를 띠었다. 조선시대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화폐의 유통은 대체로 저조하였으며 화폐의 보급도 17세기 이후에야 추진되었다. 태종 때는 사섬서(司贍署)를 두어 저화(楮貨)의 유통을 꾀하였고 세종 때는 조선통보를 발행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쌀과 포(布)가 유력한 유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국내외의 상업이 활기를 띠면서 숙종 때 법화(法貨)로 채택, 유통되기 시작한 상평통보는 그 뒤 널리 통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품유통도 촉진되었다. 고종때는 흥선대원군이 악화(惡貨) 당백전(當百錢)을 남발하여 유통질서에 혼란을 초래하였는데, 이를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및 서양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 조선 말기 화폐·금융 및 재정에 관련된 정책이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 따라 진행되어 통화계에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다. 한편 문호개방에 따른 외국상인들의 상권침해도 심각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객주와 여각은 상회사(商會社)를 설립하고 정부는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여 보부상을 보호하는 등 외국상인들에 대한 대항책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외국상사들이 상업·무역 외에 광업·제조업·염업·선운(船運)·금융 등에까지 진출하여 열강들의 이권쟁탈은 더욱 심화되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관설회사(官設會社)·관허회사(官許會社) 등의 형태로 근대기업이 형성되기 시작한 뒤 독립협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근대적 민족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1897년(고종 34) 대한직조공장, 1900년 종로직조사가 설립, 운영되는 등 특히 방직업에 많은 관심이 모아졌고, 1896년에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조선 각지에서 싹튼 근대적 상업과 산업은 일본 침탈과 함께 더이상 명맥이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의 사회


신분제도
조선은 양반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사회신분은 고려시대로부터 계승된 사회 기반과 유교적 이념 위에 이루어졌다. 대체로 15세기에는 양반·상민·천인, 16세기 이후에는 양반·중인·상민·천인으로 구분되었다. 15세기는 사회신분 구조가 크게 개편된 시기로, 노비의 변정(辯正),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의 설정 등에 따른 양인의 확대와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의 관료진출 제한에 따른 지배층의 계층분화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양반은 사회의 지배층인 사대부계층을 일컫는 말로서, 고려시대의 문벌귀족에 비하여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중인은 집권지배층의 자기도태시책으로 16세기 이래 신분이 격하되어 형성된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의 계층으로, 좁게는 서울의 기술관을, 넓게는 서울과 지방의 하급관리인 아전·군교와 서얼 등을 통틀어 일컫는다. 상민은 농민 상층부와 약간의 상공인들로 이루어지며, 백성·양인(良人)·평민·서인(庶人)·상인(常人)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민은 전세·신역·공물의 의무를 지면서도 교육과 과거를 통한 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사회계층의 최하층인 천인의 대다수는 노비였고, 그 밖에 재인(才人)·백정·무당·창기(娼妓) 등도 이에 속하였는데, 노비는 개인이나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신분제도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 이후 큰 변동을 겪게 되었다. 양반에게는 벌열·향반(鄕班)·잔반(殘班)의 구분이 생겨났고, 중인계층은 부를 축적하고 문학적 소양을 쌓아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다. 노비 가운데서도 도망하거나 군공(軍功) 등을 통해 양인이 되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신분변동으로, 양반수는 현저히 증가한 반면 노비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호구와 가족제도
조선시대의 호구 파악은 역(役)의 부담자를 알아내려는 목적이 우선이었으므로 언제나 정(丁)의 조사에 중점이 두어졌다. 매 3년마다 호적의 정비를 실시하였는데, 호적에는 주소, 본인의 관직·성명·연령·4조(祖), 처의 성씨·연령, 솔거자녀의 연령·성명, 노비 및 고공의 연령·성명 등을 기록하였다. 호(戶)란 가구의 뜻인 가호(家戶)를 이르기도 하였으나 법제상으로는 3가(家) 외에 3정(丁)을 호로 편성하였으며, 구(口)란 남정 또는 남정·여정을 함께 뜻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계정법(計丁法)에 따라 정해진 3등호제는 계정법이 계정계전절충법을 거쳐 계전법(計田法)으로 바뀌면서 호의 등급도 대·중·소·잔(殘)·잔잔(殘殘)의 5등호제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회구성의 기본단위는 가족이었다. 따라서 사회는 가족을 중심으로 가부장적(家父長的)·유교적으로 운영되어 가장은 가족을 대표하고 조상의 제사를 주재할 뿐 아니라 관청에서 내리는 명령도 가장을 상대로 하였다. 가(家)의 확대개념인 문중(門中)도 중요시되어 종족집단이 점차 조직화되었고, 16세기에 와서는 종족관념이 더욱 굳어져 족보가 널리 유행하였다. 또한 가족제도와 지연을 결부시킨 집단으로 동족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친족이라 하면 4대조를 공동조상으로 삼는 동고조(同高祖) 8촌의 집단을 가리켰다. 가족과 그 확대개념인 친족, 친족집단의 연장인 종족은 각기 사회구성의 기본단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족제도와 관련된 예법으로는 혼인·상장(喪葬)·제사가 있다. 예법은 양반가에서 엄격히 준행되었고 서민가에서는 훨씬 가벼웠다. 혼인연령은 《경국대전》에 남자 15세 이상, 여자 14세 이상으로 정해져 있었고, 동성혼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또한 여자의 재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상장은 상복에 따라 참최(斬衰)·제최(齊衰)·대공(大功)·소공·시마의 오복제도였고, 복상의 기간은 3년·기년(12개월)·9개월·6개월·3개월로 구분되었다. 재산의 상속은 종법에 따라 자녀에게 고루 분배하되 제사를 주재(主宰)하는 적장자(嫡長子)에게 많은 몫이 돌아갔다.

조선의 문화


한글창제
조선시대의 문화적 성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로 알려져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문화사상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일부 한자의 음만을 사용한 이두나 그 자획의 일부를 떼어 표시하는 구결 등으로 한문에 토를 달아 의사표시를 하기도 했으나 일반 백성은 대개 문맹의 상태였다. 이에 세종은 일상 쓰는 말에 부합하는 민족의 문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누구나 쉽게 문자를 배워 쓰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조선적인 지배질서를 확립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훈민정책의 일환으로 국자(國字)를 제정하려는 뜻을 가지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새 글자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28자로 된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1443년(세종 25)의 일이며, 그 뒤 오랜 연구와 실제경험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용비어천가》를 비롯, 불교·유교의 여러 경전 및 농서·병서 등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한글소설·한글시가가 지어지면서 한글은 국자(國字)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상·종교


유학
조선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왕씨정통의 문란과 배원친명의 외교정책에서 찾으려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에 깃든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의 반영이었다. 조선초 성리학은 철학적인 면보다 실제적인 법전·사장(詞章) 등에 주력한 관학파(官學派;훈구파)가 기성사류(旣成士類)를 형성하였다.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격한 정도전(鄭道傳)과 성리학 연구에 의한 이상적 선정덕치(善政德治)의 근거를 탐색한 권근(權近)이 대표자였다. 조선의 문물제도가 기틀을 완전히 잡았던 15세기부터는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사림파는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 실천에 심혈을 기울여 실천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뚜렷이 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는 성리학적 의리(대의)의 정치적 합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정몽주(鄭夢周)에서 시작하여 길재(吉再)·김숙자(金淑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관(學統觀)은 도학적 측면의 의리구현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한국의 성리학이 의리실천의 차원을 넘어 이론적 탐색이 본격화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황(李滉)·이이(李珥)를 중심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理氣)해석의 문제를 두고 학계는 퇴계학파·율곡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로 갈라졌다. 주리파는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되어 이황이 집대성하였으며 이것이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으로 계승되고, 주기파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가 집대성하여 김장생(金長生)·정엽(鄭曄) 등으로 계승되었다. 한국성리학의 자랑인 사칠론을 중심으로 한 심성론(心性論) 위주의 심오한 이론탐구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체제합리화에 의한 사회의 안정화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질서가 문란해졌던 16세기말, 성리학의 중심문제로 떠오른 것은 예학(禮學)의 문제였다. 성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라고 할 예학은 정구·김장생 등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으나, 복상(服喪)문제를 둘러싼 예송(禮訟)형식은 당쟁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또 한번의 이론논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변화되었다. 이는 경화된 예학적 사회풍토를 사칠론 등의 심성론만으로 뒷받침하기에 부족함을 느껴 우주론의 차원으로 이론을 심화·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리설의 전통은 19세기 위정척사사상으로 이어졌고, 주기설의 전통은 임성주(任聖周)·정약용(丁若鏞)을 거쳐 최한기(崔漢綺)에 이르러 서양의 경험론과 결합되었다. 한편 영·정조 시대인 18세기에는 종래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학풍을 떠나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민생(民生)을 중시하는 실학이 크게 대두, 천문학·역학·수학이 발전하였고 새로운 지리서·역사서·의서·농서 등이 간행되었다. 실학자들은 토지제도·조세제도·신분제도의 개혁 및 상공업의 중시, 정치·경제·사상의 변혁을 제기하였다.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정약용 등이 있다. 특히 상공업을 일으키고 기술을 도입, 부국강병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北學派) 사상은 뒷날 개화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개화기 민권사상으로 연결되었다.

불교
조선은 처음부터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불교 중심의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백성들 가운데는 여전히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사원의 수를 대폭 줄이는 동시에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사원경제를 약화시켰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로 불교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태조·세종·세조는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였다. 세종은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법회(法會)를 행하였으며, 세조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경을 번역, 간행하도록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짓는 등 사원 및 승려의 보호에도 힘썼다. 그 뒤 성종·연산군·중종은 다시 불교억압책을 써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잠시 불교보호책을 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휴정(休靜) 등이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휴정은 선·교 양종을 조계종(曹溪宗)으로 일원화하였고, 염불을 선(禪)과 동일시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불교가 배척되던 조선사회의 승려들은 천인 대우를 받았으며, 사찰은 산간으로 밀려났다.

서학
1603년(선조 36) 무렵에 명나라에 갔던 사신 이광정(李光庭)이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져온 것이 서양을 알게 된 시초였다. 인조 이후부터는 서양의 많은 문물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과학이나 사상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졌다. 서양인과의 접촉이나 그 문물의 전래는 우선 동양만을 그 전부로 알던 조선인의 세계관을 그만큼 넓혀 주었고, 또 그로부터 얻은 과학지식이나 새로운 식견은 두 전란을 치르고 난 당시의 지식인들의 관념이나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외적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같은 가톨릭서적은 새로운 학문의 대상으로서 실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는 뒤에 남인학자(南人學者)를 중심으로 한신앙운동으로 번져 갔고, 기존사회가 이미 붕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던 18세기 후반기에는 일부 사회계층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가톨릭사상은 양반 중심의 사회질서나 유교적인 윤리도덕과 생활규범을 혼란케 하는 것이었으므로, 전례문제를 계기로 점차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가톨릭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등 3차례에 걸쳐 큰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신도는 갈수록 늘어 1821년 조선교구(朝鮮敎區)가 독립하였으며 문호개방 후에는 그리스도교의 국내선교가 묵인되었다.

동학
동학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가 양반사회의 모순을 해소하고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인내천(人乃天)사상을 기본으로 유·불·선 3교를 통합하여 창시한 민중 종교이다. 동학의 교리는 《동경대전(東經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에 담겨 있다. 동학은 1863년 최제우가 체포, 처형되는 등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까지 발전하였는데 여기에 개입된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로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 뒤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동학계통의 유사종교가 속출하여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그 가운데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은 미래국토, 이상향에 대한 대망사상으로, 후천개벽사상과 함께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출현한 민중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1909년(순종 3) 나철(羅喆)은 대종교를 창건, 민족 원시신앙을 체계화하였고, 김항(金恒)은 《정역(正易)》의 체계화를 통해 후천개벽을 주장하였다. 또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강일순(姜一淳)이 전라도 고부(古阜)지방에서 일으킨 증산도와 1916년 박중빈(朴重彬)이 창시한 원불교 등이 민중종교로서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도교와 민간신앙
고려 후기부터 국가적인 보호를 받던 도교신앙은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초기에는 소격서가 설치되어 제천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 사림들이 도교배척운동을 펴 소격서가 폐지되었고 성리학을 표방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도교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여전히 도교계통의 신앙이 전해졌고, 도인(道人)들은 환인(桓因)·단군(檀君)을 한국 도파의 시조로, 김시습(金時習)을 중조로 내세우면서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무격신앙은 금무(禁巫)라는 국가정책에 따라 다소 제한을 받았으나 여전히 번창하였다. 무격을 전담하는 활인서(活人署)·성수청(星宿廳) 등의 관청에 국무(國巫)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하도록 하였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복무(占卜巫)가 성행하였다. 그 밖에 고려 이래의 풍수설(風水說) 및 《정감록(鄭鑑錄)》 《토정비결(土亭秘訣)》 등의 비기(秘記)·참서(讖書)가 민간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과학·기술
조선 초기에는 천문기기의 제작을 비롯한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유교의 정치철학에 있어서 왕도정치는 천도·천리와 합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문기상의 변화는 임금의 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으로 여겼었고, 현실적으로도 주로 토지경제에 의존하는 농본사회였으므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천문역상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중국의 역법(曆法)을 참고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었고, 이천·장영실(蔣英實)에게 대소의 간의(簡儀),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천문기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특히 자격루(自擊漏)와 현종 때 제작된 혼천시계 등은 매우 정밀하고 우수한 기기들로서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물리적 원리와 기술을 망라한 것이었다. 1442년(세종 24)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각 도는 물론 군현에까지 배치하여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중농정책과 관련하여 농학이 발달하였는데, 세종 때 한국의 풍토에 맞는 농사기술과 품종의 개량을 소개한 《농사직설(農事直說)》이 편찬되었고, 후기에도《색경(穡經)》 《농가집성》 《임원경제지》 등 많은 농서가 간행되었다. 농업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시비법(施肥法)이 개발됨에 따라 휴한법(休閑法)을 극복하고 연작법(連作法)을 보급시켰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수전(水田)은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한전(旱田)은 농종법(壟種法)에서 견종법으로 바뀌어갔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삼남지방에서는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하여졌다.

의학·약학에 있어서는, 세종 때 국산약재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학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의방유취(醫方類聚)》가 편찬되었고, 1613년(광해군 5)에는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서의 하나로 꼽히는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총 23편으로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의학서들과 함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한 이제마(李濟馬) 등 의사·의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의 왕권확립기와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기에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이에 따라 활자의 개량과 인쇄술의 발달이 촉진되어 계미자(癸未字)·갑인자(甲寅字) 등 정교한 활자가 많이 개발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화차(火車)·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거북선 등 여러 가지 무기가 개발, 주조되었는데 특히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鐵甲船)으로서 임진왜란에서 크게 위력을 발휘하였다.

예술


문학
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작됨으로써 국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시대에 박인로(朴仁老)·신흠(申欽)·윤선도(尹善道) 등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박인로의 <조홍시가>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오우가(五友歌)> 등이 유명하다. 후기에 이르면서 서리나 기생 등으로 작가층이 확대되었고, 형식면에서 장형화(長型化)되고 내용면에서 사실성을 띤 사설시조가 유행하였으며, 또한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 등 여러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가사(歌辭)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이후 사대부문학으로 자리잡아 은거가사·유배가사·기행가사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고, 송순(宋純)을 거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그 뒤 영남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규방가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국문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홍길동전》의 뒤를 이어 《장화홍련전》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옥루몽》 등의 많은 국문소설들이 쓰여졌고 《윤하정삼문취록(尹河鄭三門聚錄)》과 같은 방대한 대하국문소설들도 많이 나왔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지방의 무가(舞歌)에 기원을 두고 발생, 신재효(申在孝)가 사설을 정리하면서 급성장하여 사대부와 서민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한편 한문학은 국문학을 누르면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유지하였다.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은 신라 이래 조선초까지의 시문을 정리하여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문인들의 설화문학이 성행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나왔다. 김시습(金時習)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을 지었으며, 중기에 와서는 한문4대가가 나와 복고적인 고문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후기에는 참신한 문체와 독창적 내용에 관심을 두었던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를 비롯, 당시 사회를 풍자한 <양반전>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중인들에 의한 한문학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소대풍요(昭大風謠)》 《풍요삼선》 등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미술
조선 초기의 그림은 양반들이 그린 북종화(北宗畵) 계통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남종화로 학풍이 바뀌어갔으며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후기에는 또한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화풍이 유행하였으며,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은 각자 독특한 풍속화를 개척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송설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들어와 김정희(金正喜)가 중국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였다. 도자기 제조기술도 발달하여 우수한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瓷) 등이 많이 나왔다. 특히 백자는 담백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선의 대표적인 공예작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도시의 궁궐과 성곽·성문·학교 등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조선시대의 건축물은 대개 규모가 작고 소박하면서도 주위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개성의 남대문(南大門),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을 들 수 있다.

음악·연극·무용
세종 때 박연(朴堧) 등은 악기를 새로 만들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아악(雅樂)을 대성시켰다. 성종 때는 《악학궤범(樂學軌範)》, 그 뒤에는 《악장가사(樂章歌詞)》 등의 음악서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궁중음악과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가사·시조·가곡(歌曲) 외에 각 지방의 민요와 판소리 등이 발달하였다. 무용은 중기 이후 무당춤·탈춤·농악·승무 등 인간적인 내용을 갖춘 표현적인 춤으로 발전하였고, 탈놀이[假面劇(가면극)]인 산대(山臺)놀이와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 등은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조선의 대외관계


중국과의 관계
조선은 개국초부터 친명책(親明策)을 표방, 유지하였다. 조선의 왕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요한 국정에 관해서는 명의 의견을 묻는 한편 정기적인 사행(使行)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조공(朝貢)과 회사(回賜)의 형식으로 실질적인 유대관계를 지속시켰다. 명나라는 조공이라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을 지켰으며, 조선은 경제적 이득과 함께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정권의 국제적 승인이라는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의 조공품은 주로 금·은·인삼 때로는 처녀·환관 등이었고, 명나라의 회사품은 견직물·약재·서적 등이었다. 이러한 조공과 회사의 관무역은 조선의 상업활동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조선과 명의 관계는 선조 때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가 해결됨으로써 더욱 긴밀해졌고,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의 원군이 조선을 돕기도 하였다. 16세기 끝무렵 명의 세력이 약해지고 만주지방에서 누르하치[奴兒哈赤(노아합적)]가 후금(後金)을 세우자, 광해군은 양단정책(兩端政策)을 펴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후금과의 우호관계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향명배금정책(向明排金政策)이 실시되자 후금은 조선을 침략,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뒤 다시 침임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해마다 막대한 세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도 조선은 표면상 사대를 취할 뿐 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여전하여 여러 차례의 북벌계획이 논의될 정도였다. 그런 과정에서도 조선과 청은 부연사행(赴燕使行)을 통한 조공 이외에 사신에게 허용된 사무역, 국경에서의 개시(開市)와 후시(後市) 등으로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청의 문화가 전래되어 조선에서 실학이 일어나는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두 나라 사이에는 1712년(숙종 38) 세워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둘러싸고 국경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고압적인 자세로 군사개입을 하고 위안스카이[袁出凱(원출개)]를 파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으나,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우월권을 상실하여 통상적인 외교·무역관계만을 유지하였다.

여진(女眞)·유구(琉球)·남만(南蠻)과의 관계
조선은 여진을 야인이라 하여 정복과 회유를 병행하는 교린(交隣)의 관계를 취하였다. 여진의 추장에게 명예관직을 주어 형식상 종속관계를 맺고, 진상과 회사라는 관무역을 행하면서 여진의 복종에 만족해하고 여진은 문물의 수입으로 만족하는 관계였다. 세종 때 함경도와 압록강 방면의 여진족을 정벌하여 각각 6진과 4군을 설치하였다. 또한 조선에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인 대책으로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두어 생필품을 바꾸어 갈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마필(馬匹)·해동청(海東靑)·산삼·모피 등이 조선에 들어왔고, 그들은 면포·마포·저포·미두(米豆)·염장·농구·종이 등을 가져갔다. 그러나 조선과 여진의 밀착을 우려한 명나라의 반대로 건주여진(建州女眞)과의 통교를 끊고, 1467년(세종 13)에는 명의 요청으로 건주본위를 토벌하였으며, 그뒤 1583년(선조 16) 여진 이탕개(尼湯介)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초 건주좌위 출신의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움으로써 관계양상이 역전되었다. 한편 유구와의 관계는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1401년(태종 1) 조선에 사신을 보내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뒤 유구는 매년 신하를 칭하며 방물(方物)을 공납하였고 조선에서 관직을 받는 자도 있었다. 조선과 유구의 통교는 잦은 편이었고 인조 때까지도 그 관계가 이어졌다. 자바와 샴은 남만이라 불렸는데, 샴의 아유티아왕조는 태조 때 그들의 방물인 소목(蘇木)·속향(束香) 등과 함께 사절을 보내옴으로써 통교를 시작하였다. 자바도 태종 이래 진언상(陳彦祥)을 여러 번 사절로 보내 남양의 토산과 인도의 번포(蕃布)를 바쳤다. 자바는 그때 마지바히트왕조로서 한창 융성하던 시기였다.

일본과의 관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왜구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말에 빈번하던 왜구의 침입은 조선 건국초 다소 뜸해졌으나 소규모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태조는 즉위초에 아시카가바쿠후[足利幕府(족리막부)]에게 왜구를 다스리도록 요청하고 몇년 뒤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통교 이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조선은 1419년(세종1)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을 정벌하였으며 1443년에는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쓰시마도주(島主)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3포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교역을 중단하였다가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로 재개하고, 1535년 고성(固城) 사량진(蛇梁津)의 난으로 다시 교역을 중단하였다가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로 재개하는 등 단교와 통교를 반복하였다. 명종 때 을묘왜변이 일어난 뒤 마침내 일본인 내왕이 금지되고 정식교섭도 끊기게 되었다.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가져왔으나 일본에서는 조선의 도자기·서적·활자 등의 기술이 전래되어 문화의 급진전이 이루어졌다. 전란 후 일본에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덕천막부)]가 들어서 조선에 통교를 요청하여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었다. 그 뒤 12차례 파견된 조선의 통신사는 외교사절과 문화의 전파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1811년(순조 11) 이후 일본의 역지교역(易地交易) 주장이 대두되자 통신사행렬은 끊어지게 되었다. 그 뒤 일본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한론(征韓論)이 일기 시작하였고, 드디어는 1875년(고종 12) 운요호사건을 조작하여 이듬해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 침략을 계속하여 1910년에는 주권을 강탈, 조선을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와의 관계
조선은 효종 때 청나라의 요청으로 두 차례의 나선정벌(羅禪征伐)을 실행하였다. 조선과 러시아의 본격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은 1860년(철종 11) 베이징조약[北京條約(북경조약)] 체결로 러시아가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조선은 청·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1884년(고종 21)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노골적인 간섭정책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두 차례의 조·로밀약 체결을 시도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을 일으킨 러시아는 군사교관·재정고문을 파견하는 등 한때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하였지만, 원칙적으로는 만주 중심의 정책을 수행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을 견제하는 완충지대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후 A.M. 베조브라조프의 전진정책을 취한 러시아는 마산항(馬山港)·용암포(龍巖浦)를 점령하는 등 무모한 한반도정책을 펼쳐 러·일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에서 패한 뒤 조선과의 관계는 단절상태를 맞았다.

서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조선은 선조 이후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인조와 효종 때 네덜란드인 박연(朴淵;J.J. 벨테브레)과 H. 하멜이 제주도에 각각 표착하여 무기제조 등을 도운 일이 있었으나 서양과의 본격적인 관계는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1882년(고종 19)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조선은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조선을 둘러싼 서양열강들의 세력다툼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던 이들 조약의 체결로 조선의 약체화는 가속되었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은 조선의 내정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으면서 각종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가운데 영국의 진출은 특히 두드러졌으며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동양함대가 거문도(巨文島)를 무력점령하기도 하였다. 1834년(순조 34) 이래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하였던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통해 조선과 대결하다가 1887년(고종 24)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가톨릭 선교사의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조선과 서양의 공식적인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한편 문호개방 이후 조선은 서양에 은둔국으로 알려졌고, 서양의 교통·통신·의료기술 등을 도입하여 근대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조선시대 호구수와 추정인구
연대추정인구
태종 6180,246(수도 제외)370,3655,869,000
세종 14220,375801,8476,512,000
인조 26441,3211,531,36510,860,000
효종 8658,7712,290,08311,226,000
현종 101,313,4535,018,64413,192,000
숙종 431,560,5616,846,56816,347,000
영조 291,772,7497,298,73118,656,000
순조 71,764,5047,561,40318,619,000
철종 31,588,8756,801,20616,625,000
광무 81,419,8995,928,80217,219,000


조선 연표
AD1392고려 멸망, 조선 건국. 7월 이성계,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
1393국호를 <조선>으로 정함
1394한양 천도. 《조선경국전》 편찬
1395대묘(大廟)·신궁(新宮:경복궁) 완성. 전제개혁
1396도성축조 완료. 이키섬[壹岐島]·쓰시마섬[對馬島] 등 왜구의 소굴을 침
1397《경제육전》 간행
1398제 1 차왕자의 난. 태조, 세자 방과(芳果:정종)에게 선위
1400제 2 차왕자의 난. 정종, 방원(芳遠:태종)에게 선위
1401문하부를 의정부에 병합
1402무과(武枓)의 법(法) 처음 실시
1403동활자 계미자(癸未字) 주조. 명(明)나라 사신, 고명(誥命)·인장·조칙(詔勅) 가져옴
1405의정부 서무, 육조에 귀속
1407백관의 녹과(祿科)를 정함
1412조운법(漕運法) 실시
1413호패제 실시. 8도의 지방행정조직 완성. 《태조실록》 편찬
1414백일장 처음 실시
1415관제개혁 단행
1418태종, 세자(세종)에게 선위
1419이종무(李從茂), 쓰시마섬 정벌
1420집현전 확장
1422기근으로 각도에 진제소(賑濟所) 설치
1423《고려사》 편찬. 재인(才人)·화척(禾尺)을 백정이라 함
1424불교 각파를 선(禪)·교(敎) 양종으로 통합. 조선통보 주조
1425처음으로 동전 사용
1426사가독서(賜暇讀書) 실시. 한성에 큰불 남
1428결부법(結負法) 실시
1432《삼강행실도》 편찬
14334군 설치. 《신찬경제속육전》 완성
1434앙부일구(해시계) 제작, 시간 측정
1437공법(貢法) 실시. 6진 설치
1438생원·진사시험 실시
1443쓰시마 도주와 계해약조 맺음. 훈민정음 28자 창제
1444전분육등법·연분구등법 정함
1445용비어천가 완성
1446훈민정음 반포. 세종, 처음으로 공문서에 한글 사용
1450문종 즉위. 8도지도 만듦
1452단종 즉위. 《고려사》 인쇄
1453계유정난. 이징옥(李澄玉)의 난 일어남
1455단종, 수양대군(세조)에게 선위
1456성삼문 등 6신(六臣), 상왕 복위를 꾀하다 사형
1463《동국통감》 찬수
1466직전법 실시
1467이시애(李施愛)의 난 일어남
1469성종 즉위
1470《경국대전》 완성
1474《경국대전》 및 《속록》 반포
1481《동국여지승람》 편찬
1482폐비 윤씨 사사(賜死)
1484창경궁 완성
1492《대전속록》 편찬
1493《악학궤범》 완성
1494연산군 즉위
1498무오사화 일어남
1500과부 개가 금함
1503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함
1504갑자사화 일어남
1505조관(朝官)에게 신언패(愼言牌)를 달게 함
1506박원종(朴元宗) 등,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중종반정)
1508어사(御史)를 8도에 보냄
1510삼포왜란
1511《삼강행실》 반포
1512일본과 임신약조 체결
1515조광조(趙光祖), 정계 등장
1516사찰의 노비·논밭을 조정으로 귀속시킴
1519조광조, 대사간이 됨. 기묘사화 일어나 조광조 사사
1526경기·강원·함경도에 열병 만연
1527작서(灼鼠)의 변 일어남
1530《신증동국여지승람》 완성
1535의정부 모두 불에 탐
1538성주사고(星州史庫) 모두 불에 탐
1543주세붕, 백운동서원 세움
1544인종 즉위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로 윤임(尹任) 사사
1547쓰시마 도주와 정미약조(丁未約條) 체결
1550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 하사
1551보우(普雨), 판선종사(判禪宗事)가 되어 불교 재건
1554비변사 설치
1555을묘왜변 일어남
1559황해도에 의적 임꺽정 출현
1560이황, 도산서원 세움
1562임꺽정 체포 처형
1567선조 즉위. 불교 다시 탄압
1570전국 대기근. 관리의 녹봉 감함
1574이이, 만언소(萬言疏) 올림
1575동·서 당론 일어남
1583이이, 시무육조 지어 올림
1589정여립, 모반하다가 자살. 전국에 전염병 만연
1591이순신 전라좌도수사가 됨
1592임진왜란 일어남. 거북선 처음 출전. 옥포(玉浦)대첩. 한산도대첩
1593행주대첩.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
1594훈련도감 설치
1595이순신, 삭직·백의종군
1596이몽학(李夢鶴)의 난 일어남
1597정유재란. 이순신, 명량대첩
1598이순신 전사
1601양전(量田) 실시
1605파발을 둠
1607일본과 국교 회복. 일본에 처음으로 통신사 파견
1608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광해군 즉위
1609삼포 다시 개항
1610《동의보감》 완성
1613영창대군, 강화도에 위리안치
1616일본으로부터 담배 들어옴
1618인목대비 서궁에 유폐
1619도원수 강홍립(姜弘立), 금(金)나라에 항복
1623김류 등,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인조반정)
1624이괄의 난 일어남
1625서얼의 관계 등용 허용
1626남한산성 쌓고 수어청 설치
1627정묘호란 일어남
1628벨테브레, 제주도 표착. 강화도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 설치
1631정두원(鄭斗源), 명(明)나라로부터 천리경·자명종·화포 등을 들여옴
1636병자호란 일어남
1637인조, 삼전도(三田度)에서 청(淸)나라 태종에게 항복
1644심기원(沈器遠) 등 모반자 주살
1645소현세자, 과학·가톨릭에 관한 서양서적을 가지고 귀국
1646임경업 사형
1648청나라, 시헌력(時憲曆) 보내옴
1649효종 즉위
1651호서지방에 대동법 실시
1653하멜, 제주도 표착. 시헌력 채택
1654청나라, 러시아정벌에 조선 조총병 징발
1659현종 즉위
1660남인·서인간에 예론(禮論) 일어남
1662제언사(堤堰司) 설치
1663소를 죽인 자는 살인자와 같이 벌함
1669송시열의 건의로 동성결혼 금함
1674숙종 즉위
1677경상도에 대동법 실시
1678상평통보 주조
1682금위영 설치
1683노론·소론 분당
1689기사환국 일어나 김수항(金壽恒)·송시열 사사. 김만중, 《구운몽》 저술
1690호적법을 밝히고 지패(紙牌)를 목패로 바꿈
1694갑술옥사 일어남
1696안용복(安龍福), 일본어선의 울릉도출어를 항의하여 일본의 사과를 받아냄
16978도에 대기근
1699남형(濫刑) 금함. 전염병 만연, 사망자 25만여 명
1701장희빈 사사
1703군제(軍制)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이정청(釐正廳) 설치
1708전국적으로 대동법 실시
1711북한산성 축성. 일본에 통신사 보냄
1712백두산 정계비 세움
17138도에 암행어사 파견
17148도에 지진 일어남
1717전국 호수 54만 7709, 인구 682만 9771. 황해도 연해에 황당선(荒唐船) 출몰 빈번.
1718흉년 계속, 전염병 만연으로 사망자 속출
1720경종 즉위
1722목호룡(睦虎龍) 상변(上變)
1724영조 즉위
1725탕평책 실시. 압슬형(壓膝刑) 폐지
1728이인좌의 난 일어남
1729사형수에 대해 삼복심(三覆審) 실시
1738백의를 금하고 청의를 입게 함
1740경자 엄금
1746《속대전(續大典)》 간행
1750균역청 설치, 균역법 실시
1758권농윤음(勸農綸音) 내림. 황해도·강원도 지방에 가톨릭 크게 보급
1762장헌세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음
1763고구마 전래
1770《동국문헌비고》 완성. 난장형 폐지
1772서자를 등용하게 함
1776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1778홍국영에게 권력집중
1783승려의 장안 입성 금함
1784이승훈(李承薰), 연경(燕京)으로부터 가톨릭서책 가지고 들어옴
1785《대전통편》 편찬
1786서학 금함
1788부녀자의 가체 금함
1791가톨릭교도 윤지충(尹持忠) 등 처형. 서양책 소장 금함
1794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 밀입국
1798서학에 대한 탄압책 논의
1800순조 즉위
1801오가작통법 시행. 신유박해
1804평양에 대화재 일어나 민가 5000여 호, 관청 107개소 불에 탐
1811홍경래의 난 일어남(~1812)
1821평양 인근에 괴질, 10만여 명 사망
1825무신의 가마 승용 금함
1827전국에 물난리
1831가톨릭 조선 교구 설치
1834헌종 즉위. 서울에 전염병 만연
1839기해사옥 일어남
1846김대건 신부 순교. 전국에 대홍수
1848외국선박 출몰 빈번
1849철종 즉위
1855만인소 엄금
1860최제우, 동학 창시
1861김정호, 《대동여지도》 만듦
1862진주민란으로 삼남에도 민란. 《대전회통》 편찬
1863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1864최제우 처형
1865경복궁 중건 착공. 원납전 바치게 함
1866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대동강에서 불태워짐. 병인양요 일어남
1867경복궁 근정전·경회루 완성. 성문세를 받음
1868독일인 E. 오페르트, 남연군(南延君) 무덤을 파헤침
1871신미양요 일어남. 전국의 서원철폐. 전국에 척화비 세움
1875운요호[雲揚號]사건 일어남
1876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1878부산해관, 수세(收稅) 시작
1879지석영, 종두법 전래
1880통리기무아문 설치
1881신사유람단·영선사 파견
1882임오군란 일어남. 미국·영국·독일과 수호조약 체결. 원산·부산·인천 개항. 청군, 대원군 납치. 수신사 박영효, 태극기 고안. 독일인 묄렌도르프 초빙
1883《한성순보》 발간. 태극기를 국기로 정함. 전환국 설치. 원산학사 설립
1884이탈리아·러시아와 수호조약 체결. 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일어남
1885영국함대, 거문도 점령. 광혜원 설립. 대원군, 청나라에서 귀국. 배제학당 설립. 서울~인천간 전신 개통
1886육영공원·이화학당 설립. 프랑스와 수호조약 체결
1887영국군함, 거문도에서 철수. 정동교회·새문안교회 설립
1889함경도에 방곡령(防穀令) 선포
1890《승정원일기》 편집 완료
1892오스트리아와 수호조약 체결. 전환국에서 서양식 화폐 주조
1893동학교도, 보은(報恩)에 집결하여 교조신원운동 벌임
1894동학농민운동 일어남. 갑오개혁 시작. 청·일전쟁
1895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 단발령. 태양력 실시. 도형(徒刑) 폐지. 유길준, 《서유견문》 냄
1896《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설립. 아관파천. 각지에 의병 일어남. 전국 13도로 개편
1897대한제국 성립. 경인선 철도 기공. 경운궁에 전화 가설
1898만민공동회 개최. 《황성신문》 발간. 명동성당 건립
1899경인선 개통. 마산·군산·성진항 개항
1900한강철교 준공. 만국우편연합 가입. 경인선 완전 개통
1901경부선 철도 착공. 금본위제도 실시
1902서울~인천간 전화 개통
1903YMCA 발족. 덴마크와 통상조약 체결. 서울에 수도시설 착공. 러시아, 일본에 한국 39도선 분할 제의
1904한·일의정서 조인. 한·일협약 성립. 경부선 준공. 러·일전쟁 일어남
1905을사늑약 체결. 경의선 개통. 《대한매일신보》 발간
1906통감부 설치. 각지에서 의병 일어남. 동학, 천도교로 개칭
1907국채보상운동 일어남.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강제퇴위, 순종 즉위. 한국군 해산. 신민회 설립. 황태자 일본에 감
1908전명운(田明雲) 의사, 스티븐스 사살
1909일본, 청과 간도협약 체결. 의병, 서울진공 작전.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 사법권 일본으로 넘어감
1910경찰권 일본으로 넘어감. 강압에 의해 한·일합방조약 체결. 8월 29일 합방조약 발표, 양위조서 내림, 518년 존속되어온 조선왕조 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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